써니 하춘화 남편 직업 이인순 나이 고향 결혼 자식
카테고리 없음예전에 방송된 SBS플러스 예능프로그램 ‘김수미의 밥은 먹고 다니냐?’에는 가수 하춘화가 출연, 가수 데뷔부터 결혼까지 인생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답니다.
해당 방송에서 하춘화는 “올해 벌써 결혼 25주년 됐던 것 같다”며 “처음엔 중매인 줄 모르고 나갔던 것이다. 누군지도 몰랐는데 체인스모커더라. 줄담배를 피우는데 그 모습이 너무 미워보였던 사람이다. 그래서 ‘뭐 저런 사람이 있다’했는데 그 사람이 내 중매 상대였던 사람이다”고 말문을 열었답니다.
그는 “다음날 만났는데 와이셔츠 안에 검은 런닝을 입고 왔던 것이다. 안쓰러웠다.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그렇구나 싶었던 마음이다”며 “처음 보고 1년을 안 만났다. 크리스마스 디너쇼를 하는데 국장 언니가 그 사람을 데려왔던 것이다. 그때 남편이 ‘12월 31일 무슨 호텔에서 만나요’ 그러더라. 그게 너무 웃겼던 것 같다”고 회상했답니다.
그러면서 “그 날짜에 나갔는데 남편이 10분이 지나도 안 오더라. 불쾌했던 상황이었다. 한참 지나서 왔는데 눈이 돌아가 있었다. 그때가 망년회라 회사 종무식에서 술을 마시고 온 것이다. 자리에 앉더니 ‘일찍 오셨어요?’ 이러는데 발음이 다 꼬여 있었던 것이다. 취하니까 말을 더 잘하더가”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답니다.
하춘화는 아울러 유산의 아픔을 털어놓기도 했답니다. 그는 “첫 애를 유산으로 잃었다”며 “노력을 많이 해봤지만 안 생기길래 하늘이 공평하게 나에게 큰 재능을 주셨지만 아이는 안 주시나보다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자식이 없다는 것을 큰 결점으로 생각하던 것이다. 입양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다 말렸다”고 털어놨답니다.
한편 하춘화의 고향 출생지는 전남 영암이며 1955년 6월 28일생이랍니다!! 참고로 하춘화가 데뷔한 해는 7살 때인 1961년때이며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그 년도랍니다.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것인데, 엘자 륑기니나 다코타 패닝 저리가라 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참고로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 부친인 하종오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답니다. 이후에 지난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답니다.
음반은 1971년에 처음으로 냈던 상황인데 이 음반의 노래인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으며,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와 아울러서,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답니다.
이어서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던 상황이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답니다. 참고로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정말로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답니다.
이후에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정말로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던 것이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답니다.
한편 그 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할 때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상황이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답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답니다. 당시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던 바가 있답니다.